빈센트 빌럼 반 고흐(1853년 3월 30일~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작품 전부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 (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된다고 한다) 을 앓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었다.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사후에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었다. 반 고흐를 흔히 탈인상주의 (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확립하려고 한 예술 시조) 화가로 분류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어린 시절 ( 1853년~ 1869년)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미술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고, 빈센트의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간 시절 (1869년~1876년)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준다.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긴다.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한다. 이후 런던의 선교 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의 조수가 된다. [화가의 길] 마음을 다잡다(1881년~1883년) 빈센트는 어느 학교에 소속되어 미술을 배우는 것을 싫어했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결국 테오에게 설득되어 1880년 11월,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빈센트는 거기서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웠다. [뉘넌과 안트베르펜 시기 ( 1883년~1886년)] 빈센트는 뉘넌에서 그림에만 몰두한다. 집 밖에서 소재를 찾고,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했다. 직조공과 시골집에 대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수채화 여러 점과 유화 200점도 남겼다. 이 시기의 그림은 주로 음침한 흙빛, 특히 어두운 갈색으로 구성되어있다. 1885년 3월 26일에 심근 경색으로 빈센트의 아버지가 사망한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는 정물화를 여러 점 남겼고, 또한 이즈음 파리의 딜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전시할 준비가 된 그림이 있는지 물었는데, 5월에 《감자 먹는 사람들》과 몇 년간 작업한 농민 그림 여러점을 보냈다. 그러나 판매가 잘 되지 않아 빈센트는 테오에게 좀 더 영업을 잘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이 다른 인상주의 작품들처럼 밝지 못하고 너무 어두침침하다며 맞받아쳤다. 8월에 헤이그에 있는 상인 루르스의 가게 창문에 전시된 것이 그의 첫 번째 작품 전시회였다. 9월에는 빈센트의 작품에 모델로 참여한 마을 농가 소녀 중 한 명이 혼외임신을 하는데, 빈센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마을의 전임 성직자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빈센트의 그림에 모델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겨울 11월에는 안트베르펜으로 이사를 간다. 거기서 회화용품점 위의 집을 빌려 생활한다. 생활비는 아주 빠듯해서 회화용품을 좀 구입하고 빵, 커피, 담배를 사는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1886년 2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7개월 동안 따뜻한 식사는 여섯 번 정도 한 게 전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즈음 이가 흔들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이 침침하고 인기가 없다는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안트베르펜에서 미술관에 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는 등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에 카민, 코발트블루, 파리스 그린 등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안트베르펜의 부둣가에서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즈음 빈센트는 다시 폭음을 하기 시작한다. 1886년 2-3월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서 매독도 치료한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 시기 (1886년~1888년)] 줄리앙 탕기의 가게에서는 같은 해에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화와 신인상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테오는 인상주의 화들의 작품을 계속 수집했지만, 빈센트는 이런 새로운 종류의 화풍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1886년 말, 테오는 빈센트와 함께 사는 것이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갈등을 겪다가, 1887년 초에 화해한다. 빈센트는 파리의 북서쪽 교외인 아니에르쉬르센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시냐크를 알게 되었다. 빈센트가 점묘법을 채택한 것도 이 때 의 일이었다. 들라리바렛(Delareybarette)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로부터는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888년 그린 생트마리 해변의 고깃배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빈센트와 테오는 몽티셀리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다. 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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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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