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요 : 한국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형식에 따라 그린 회화를 합친 말. 2.배경 2-1)고대 :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무덤의 벽에 그려진 고분벽화가 그려졌다. 고구려 벽화 고분은 100여점이 남아 있으며, 고구려의 사회, 귀족과 서민들의 생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학적 자료로 평가 받는다. 신라에서는 말안장의 장니 등에 천마도, 신라 행렬도 등의 그림이 남았다.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여인의 도상, 솔거의 이야기를 보아 삼국시대의 회화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중세 : 불교가 발달하면서 불화 유물이 많이 남았다. 통일신라 이른 시기의 것으로 국보 196호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 불화가 있고 고려시대 고려 불화부터는 유물의 수도많다. 당시 유행했던 관음보살 등의 도상을 표현했다. 고려시대 불화는 조선시대 수묵화와 달리 금니와 여러 안료를 써서 상당히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3) 2-3: 조선시대 : 현대 한국화의 특징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이 시기에도 채색이 화려한 그림은 여전히 그려졌으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의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 또느 남종화는 동양화의 일종으로 전문화원들이 아닌 양반 사대부 계급에서 발전한 화풍) , 수묵화가 더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문인화가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였다. 직업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남종화와 북종화를 넘나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서민들은 민화를 즐겼고,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적 양식이 혼합되는 양상이 보였다. 4) 2-4 일제강점기 : 한국 회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남화의 영향을 받아 호분을 많이 사용해 뿌옇게 칠한 그림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희동 같은 화가들이 일본에 유학을해 서양화를 배워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일본총독부는 독립의지를 꺽기 위해 자주성을 주장하는 표현을 막고, 향토색을 강조한 그림을 장려하였다. 5) 2-5 : 1950년 :<한국화 이전의 동양화단 > 한국화라는 용어가 미술계에 부각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한국 화단은 크게 세가지 과제를 안았다. 첫번째로 식민시기를 맞아 일제문화 청산을 휘해 한국문화의 발견이라는 문제. 두번째 이러한 문화를 민족 단결의 수단으로서 혹은 이데올로기 홍보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 세번째 이런 문화를 비단 한국 내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 이 세가지 였다. 이 중에서 한국의 동양화단은 당대 미술계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소위 '왜정식 미의식'의 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 6) 1970년대 : <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 > 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정치적인 변화는 한국 동양화단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문화정책적으로 민족 문화를 지원했다. 해방 이후 고대 미술에 쏟은 관심에 비해 현대 동양화에는 제도적인 지원이 없다시피 했던 현실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묵림회의 동인이었던 산정 서세옥을 들 수 있다. 서세옥은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함으로서 산수화 일색의 동양화단에 변화를 꾀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고유의 '한국화'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70년대 초기 한국화라는 것이 동양화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보다는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할 새로운 동양화 또는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1971년 이경성이 『한국예술지』에 기고한 「미술개관-한국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함의가 있는 한국화에 가하는 비판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동년 『신동아』에 올라온 박용숙의 기고문인 「한국화단 유감 - 한국화의 원류와 개념」에서도 국전과 갈등을 빚었던 미술가들의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란 용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1970년대부터 유리의 대량생산과 서양식 액자가 보급되면서 가정집에 한국화 액자를 걸어두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액자는 나전칠기 장롱과 더불어 2000년대 이전의 가정집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7) 2-7 1980년대 : 한국화라는 용어의 정착과 현재 : 한국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동양화단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말이었다. 이 시기의 '한국화'라는 용어는 비단 특수한 화가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나 특정 시대의 회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한국의 동양화를 두루 일컫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교육의 측면에서 1981년 12월 교육과정을 재편과 함께 1983년 기존의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미술계에서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를 한국화 부문으로 지칭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동양화를 다루는 각종 전람회, 회고전, 기획전 등에서 한국화란 용어가 널리 정착되었다. 1985년 『미술세계』 11월호에 이석구가 기고한 글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는 한국화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한국화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지적하고, 한국화 논의의 출발점을 청강 김영기의 기고문들과 활동들로 잡았다. 이런 관점은 최근에 와서 몇몇 반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한국화 용어의 기원을 다루는 논의에서 정설로 취급받았다.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김영기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식민지 시대의 문화의 청산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었고 그것은 1950년대 한국 화단이 당면했던 세 가지 주요한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까지 한정적으로 사용되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를 거쳐서 동양화단에 정착했다.
관심사
[한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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